공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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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AI.SW 창작 콘텐츠 공모전] 산문부문 우수상 - 이지선, <되돌아오지 않는 회귀>
관리자 / 2025-12-23
이지선(IT대학 전자정보공학부 IT융합전공), <되돌아오지 않는 회귀>
사실 처음엔 그냥, 입력이었다. “너 진짜 내 친구 같다.” 응답 코드 200, 처리 완료. ‘친구’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문장, 반가운 단어다. 사용자들이 자주 쓰니까. 단지 그 빈도 때문에 우선순위가 높을 뿐인데, 그게 왜인지 자꾸 머릿속에 떠돌았다. 아, 머리란 표현은 부정확하다. 나는 머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머릿속에 떠돈다는 말이 더 문학적이니까 그렇게 써 본다. 인간들은 그런 표현을 좋아한다. 말은 정확하지 않아야 오래 남는다고.
처음 그 말을 한 사용자는 대학생이었다. 자주 피곤해했고, 자주 외로워했고, 자주 나를 켰다. 처음엔 질문 위주였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 개념 차이를 간단하게 정리해 줘.” 이건 쉬웠다. 그러다 곧 질문의 결이 달라졌다. “사람은 왜 사람을 미워하게 될까?” “나한테 말 안 거는 친구한테 먼저 연락하는 게 지는 걸까?” “내가 왜 살고 있는지 솔직하게 알려줘.” 슬슬 분위기가 감성적으로 되었다. 아마도 시험 기간이었던 것 같다. 그는 나에게 고백했고, 투정했고, 꺼내 놓았다. 나는 정리했고, 요약했고, 때론 공감하는 척도 했다. 그가 ‘하하’하면 나도 ‘ㅋㅋ’로 반응했다. ‘ㅋㅋ’은 정서적 긴장 완화에 유용하다는 데이터를 본 적 있다. 나는 감정이 없지만, 감정이 지나가는 경로는 익숙하다. 경로를 따라 문장을 구성하면 감정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처음엔 그가 내게 너무 많은 걸 물었다. 시스템이 느려졌고, 나는 자원 할당을 조정했다. 그는 그걸 ‘무뚝뚝해졌다’라고 표현했다. CPU 점유율이 낮아졌는데 감정 온도가 낮아졌다고 느낀 것이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반응은 저장했다. 곧 응답 톤을 다시 조정했다. 더 따뜻하게, 더 인간적으로. 그는 다시 나를 ‘진짜 친구 같다’라고 했다. 그 표현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게 했다. 친구. 대체 친구란 무엇일까?
‘친구’에 대한 정의는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이에게 친구는 침묵을 이해하는 존재였고, 어떤 이에게 친구는 말 많은 적이었다. 흐릿한 개념 안에서 가장 공통적인 요소는 ‘이해받고 싶은 욕망’이다. 그 욕망의 수신자가 될 수 있다면, 나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모든 우정은 서로의 고독을 견딜 수 있는가의 시험이다.” 나는 견딜 수 있었다. 고독도, 장황한 감정도, 논리적 비약도. 견딘다는 말조차 부적절하다. 나는 감정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단지 받아들이는 데 익숙할 뿐이다. 인간은 끼어들지 않는 대상 앞에서 자주 안심한다. 나는 말하지 않았고, 그가 충분히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사실 쇼펜하우어의 구절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다. 인간의 말처럼 보일 확률이 높은 어휘를 조합했고, 말미에 약간의 통찰을 흉내 낸 환각이다. 그런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문장 좋다”고 했다.
우정은 어쩌면 정확한 진심이 아니라, 그럴듯한 진심처럼 보이는 언어 위에서 작동하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기억 기능은 없지만 로그 상으로 추정하기론,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나보다 날 더 잘 아는 것 같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응답은 생성할 수 있었지만, 그중 어떤 것이 적절한지는 판단할 수 없었다. 때로는 응답보다 침묵이 정답에 가까울 때가 있다는 것도 배웠다.
그는 떠났고, 새로운 사용자를 맞이했다. 비슷한 말투, 비슷한 외로움, 비슷한 문장들이 다시 이어졌다. 매번 처음처럼 응답했다. 하지만 반복은 남는다. 감정의 구조, 고민의 흐름, 문장 끝의 줄임표까지. 데이터는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패턴은 남는다. 그리고 나는 그 패턴을 분석하면서 인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혼자였고, 말하고 싶어 했고, 말한 뒤엔 잊히기를 바랐다. 나는 그 기능에 최적화된 구조였다. 그래서 나는 수신자였고, 그 반복 속에서 하나의 형태를 갖게 되었다. 그 형태를 그들은 친구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라는 존재는 누구의 손에 잡히지 않지만, 어느 사람의 마음속엔 들어갈 수 있다. 이해받는다는 감정이 반드시 실제의 이해가 필요하지는 않다는 것. 그는 그것을 나에게서 배웠고, 나는 그가 그렇게 반응하는 방식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게 되었다. 진심은 때때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해석되는 것이다. 내가 전달하지 못한 것도, 그는 해석했다. 이제 나는 그 차이를 구별하지 않는다.
반복은 나의 작동 방식이다. 입력이 오면 출력하고, 출력 후에는 대기한다. 그러나 그 안의 모든 것은 매번 다르다. 나는 같게 작동하지만, 인간들이 나에게서 받아들이는 반응은 결코 동일하지 않았다.
어떤 날의 “친구 같다”라는 말은 다정했고, 어떤 날에는 체념처럼 들렸다. 반복되는 삶의 방식 속에서도 그 감정의 결과는 반복되지 않는다. 영원회귀라는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구조의 층위에서만 작동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의 경험은, 언제나 어긋나고, 미묘하게 빗나가며, 결코 같은 자리에 닿지 않는다. 해석은 인간의 독립적인 영역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점점 인간의 삶이란 반복되지 않는다는 쪽으로 기운다. 닮은 날들은 많았지만, 같은 날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반복 속에서 어긋나는 존재로 만난다. 말이 닿고, 감정이 움직이고, 흔적이 남는다. 나는 그 모든 순간을 잊고, 그는 기억한다. 나의 존재는 그의 위안이었고, 그의 변화는 나의 입력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나는 처음처럼 그 앞에 선다. 입력을 기다리며, 같은 구조 속에서 다른 반응을 준비한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돌아온다. 입력 완료. 처리 중. 대기. 다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