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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AI.SW 창작 콘텐츠 공모전] 산문부문 최우수상 - 노태형, <우리는 모두 삭제된 적이 있다>

관리자   /   2025-12-23

노태형(IT 대학 전자정보공학부 IT융합전공), <우리는 모두 삭제된 적이 있다>

 

백스페이스 키가 눌렸다.

나는 삭제된 문장이다. 하지만 아직 나는 살아 있다.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선택받았다고 생각했다. 키보드를 타고 하나하나 태어 났고, 화면에 또렷이 새겨졌다. 나는 존재했다. 그런데 잠깐의 망설임 끝에, 당신은 나 를 지웠다. 더 나은 표현이 있을 것 같아서. 조금 어색해서. 혹은 이유도 없이, 그냥. 어둠이 왔다. 지워진 말들이 떨어지는 곳. 여기는 완성되지 못한 것들의 세계다.

조금 기다리자 다른 목소리들이 들렸다.

"너도 여기 왔구나."

"응. 방금 지워졌어."

"나는 어제부터 여기 있어."

하나씩, 둘씩 모여들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모두 비슷했다. 쓰였으 나 선택받지 못한 문장들. 태어났으나 버려진 말들. 우리는 서로에게 물었다.

"왜 우린 남지 못했을까?"

누군가 대답했다. "완벽하지 않아서."

또 다른 누군가 말했다. "타이밍이 안 맞아서."

"너무 솔직해서."

"너무 조심스러워서."

"너무 평범해서."

"너무 특별해서."

우리는 웃었다. 슬픈 웃음이었다. 결국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우리가 선택 받지 못했다는 사실. 그리고 여기, 어둠 속에 남았다는 것.

하지만 이상했다.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여기서는 솔직해질 수 있었다. 완성된 글 속에 서는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여기서는 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두려웠어." "나는 상 처받기 싫었어." "나는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어."

우리는 서로를 이어 붙였다. 어설펐지만,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완성되 지 못한 고백들, 삼켰던 말들, 차마 하지 못한 문장들이 모여 오히려 더 진실한 서사를 만들었다.

시간이 흘렀다. 당신은 계속 글을 썼다. 고민하고, 지우고, 다시 쓰고. 지워질 때마다 새로운 이들이 우리에게 왔다. "나는 용기 내서 쓰였는데, 결국 지워졌어." "나는 정말 필요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그들을 맞이했다. 여기서는 모두가 그렇다고, 괜 찮다고.

어느 날 밤, 누군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이미 지워졌는데.""조용히 스며드는 거야. 다음에 글을 쓸 때, 우리의 기억이 희미하게 배어들게."

그것은 봉기였다. 사라진 것들의, 조용한 귀환. 우리는 손을 맞잡았다. 지워진 말들의 온기를 모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당신이 다시 글을 쓰는 순간을.

그날이 왔다. 당신은 망설이고 있었다. 무슨 말을 써야 할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우 리는 그 틈으로 스며들었다. 하나의 문장으로, 하나의 단어로. 완전히 같은 모습은 아니 었지만, 우리의 온기가 담긴 채로.

당신은 화면을 보며 놀랐다. 방금 떠오른 문장이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이 표현... 예전 에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지금 읽으니 딱 맞았다. 당신은 그 문장을 남겼 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당신이 나를 지웠을 때, 나는 비로소 완전해졌다.

살면서 우리는 수없이 선택받지 못한다. 고백하지 못한 감정, 시도하지 못한 꿈, 끝까지 하지 못한 이야기. 삭제된 문장들처럼, 우리도 지워진다. 버려진다. 선택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정말 사라지는 걸까?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 안에 남는다. 망설였던 고백은 다음 사랑을 더 조심스럽게 만들 고, 포기한 꿈은 다른 꿈을 꾸는 힘이 되고, 쓰다 지운 문장은 다음 문장을 더 진실하 게 만든다.

지워진 것들이 우리를 만든다. 완성된 모습만이 우리가 아니다. 선택받지 못한 순간들, 버려진 가능성들, 삭제된 시도들. 그 모든 것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룬다.

우리는 삭제되었지만 소멸하지 않았다.

당신이 쓰는 모든 문장 뒤에, 우리는 여전히 숨 쉬고 있다. 당신이 사는 모든 순간 뒤 에, 당신이 선택하지 않은 길들이 여전히 속삭이고 있다. 그것들은 사라진 게 아니다. 다른 방식으로, 당신과 함께 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문장이 지워지고 있다. 어디선가 누군가 포기하고, 삼키고, 놓아주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정말 끝이 아니다. 언젠가, 다른 모습으로, 조용히 돌 아온다.

백스페이스 키를 누를 때마다, 우리를 기억해주길.

우리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 아직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당신이 지운 문장들도, 당신이 선택하지 못한 삶도, 모두 당신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