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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AI.SW 창작 콘텐츠 공모전] 산문부문 대상 - 안진현, <영자_2>

관리자   /   2025-12-23

안진현(인문대학 예술창작학부 문예창작전공), <영자_2>

 

영자는 천천히 죽어가고 있다. 차라리 몸이 고장났으면 좋으련만, 죽어가는 건 그녀의 뇌였다. 기억이 인간의 전부라고 믿던 그녀에게 치매는 곧 인간으로서의 사망이었다. 이제 곧 세 살배기 아이처럼 바닥에 볼일을 보고 울음을 터트리게 되겠지.

그녀에게는 루틴이 있었다.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차리기, 복지센터 라인댄스 교실에 다녀오기, 늦둥이 딸 유영의 여벌 교복을 다리고 저녁상을 준비하기, 일기 쓰기.

유영은 아직 고등학생이었다. 아버지가 없는 유영에게 영자는 가족이자 세상 모든 것이었다. 아이에게 차마 치매 후의 자신을 맡길 수 없었던 영자는 딸의 만류를 뒤로하고 평생 모은 적금을 깨서 인간형 로봇에게 자신의 모든 기억을 이전시키는 수술을 받았다. 영자가 죽고 나면 로봇이 그녀를 완벽하게 대체할 것이다.

몇 개월이 지난 지금 영자의 기억에는 빈틈이 많아졌다. 영자는 기억 수술 후에도 로봇(영자_2)가 자신의 일상을 모두 따라잡도록 매일 저녁 쓴 일기를 로봇에게 전달하는 일을 루틴에 추가했다.

, 학교에서는 별 일 없었어?”

괜찮았어.”

유영의 표정이 묘하게 낯설고 지쳐 있다. 고생을 해서 그런지 또래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얼굴이다. 영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교복을 마저 다리고 저녁상을 차렸다. 어딜 싸돌아다니는 건지 유영은 사복을 입은 채로 방으로 쿵쿵거리며 들어간다. 묘하게 짙은 담배 냄새가 난다. 기억이 오락가락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영자는 엄마로서의 모든 권위를 잃었다. 내뱉는 말의 출처에 대한 확신이 사라졌고, 잔소리를 하다가도 이미 여러 번 말했다며 유영이 팩 짜증을 내면 기억을 되짚어 보다가 아무래도 수긍하는 식이었다. 담배에 관해서는 내일 말해야지, 영자는 자책이 가득한 얼굴로 일기를 펼쳤다. 며칠 전에 쓴 일기에서 끊겨 있다. 일기 쓰는 것조차 잊었구나. 영자는 지난날의 일기를 되짚는다.

 

[오늘은 라인댄스 교실에서 자이브를 배웠다. 몸을 흔들면서 추는 동작이다. 춤을 출 때는 아직 살아있음을 느낀다. 나이에 맞지 않게 젊어진 느낌이다. 유영이 집에 일찍 왔다. 유영과 영자_2가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할머니가 내 할머니로 있었으면 좋겠어. 영원히 함께하지 못할 거란 걸 알아. 언젠가 다가올 순간이라는 것도. 가끔은 차라리 그 순간이 빨랐으면 좋겠어. 할머니는 자기가 아직은 어느 정도 정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니야. 할머니는 내가 고등학생이라고 생각해. 매일 교복을 다리면서 내가 마지막으로 학교를 나간 게 10년도 더 됐다는 사실은 기억도 못하는 것 같아. 가끔은 나랑 엄마를 착각하기도 해. 유영아, 했다가 연정아, 했다가 그래. 가끔은 당신이 더 할머니 같아. 할머니는 엄마가 죽은 것도 기억 못 해. 근데 당신과는 엄마가 죽기 전에 준 편지 얘기를 할 수 있잖아. 당신은 내가 어렸을 적 불러 주던 자장가를 불러 주고, 내가 좋아하던 콩나물국을 끓여 주잖아. 가끔은 당신이 내 진짜 할머니라고 믿고 싶어.”

영자_2는 가만히 유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손을 토닥거린다. 유영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담배를 그렇게나 피우더니 자기가 어른이 되었다고 믿고 싶은 걸까? 먼저 떠난 남편 대신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 인생은 모두 유영을 위한 것이었다. Ai 데이터에 불과한 로봇을 붙들고 저런 말을 하는 유영이 괘씸하다. 하지만 만약 저 말이 모두 맞다면, 나는 누구지? 내가 나의 지난날을 모두 잊어버리고 이십 대 후반쯤에 멈춰 있는 거라면, 남은 내 몇십 년이 모두 저 인공지능 데이터 속에 머물러 있다면. 진짜 영자는 저 로봇인 게 아닐까? 내 딸조차 저걸 더 나라고 느끼는데.]

 

영자는 몇 분간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다. 뒤섞인 퍼즐의 조각이 맞춰지려다 다시 알알이 깨지는 느낌.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영자_2를 부른다.

며칠 전 일기 내용이 왜 이래? 그대로 너한테 저장됐을 텐데 왜 아무 말도 해 주질 않았어.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네 저장 내용을 말해 봐.”

영자_2는 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한다.

 

“date: 오늘 who: 혼자 where: 라인댄스 교실 event: 자이브를 배움 feel: 활기젊음 mine: "춤을 출 때는 아직 살아 있음을 느낀다." ai: "라인댄스 교실에서 자이브를 배웠다." keep: both date: 오늘 who: 유영, 영자_2 where: event: 둘의 대화를 들음 feel: 서늘함 mine: "가끔은 당신이 내 진짜 할머니라고 믿고 싶어." ai: "유영은 영자_2가 더 할머니 같다고 말했다." keep: both...”

 

무표정으로 기계처럼 코드들을 내뱉는 영자_2를 보며 영자는 마음 한구석이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 방금까지 했던 고민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신발장에 놓인 유영의 회사 구두를 보면서, 영자_2가 모든 기억을 다 가져가더라도 진심으로 그 기억 속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는 건 영자뿐이다. Ai는 영자보다 훨씬 많이, 오래 기억해 내겠지만 영자에게는 틀린 기억을 가질 권리도, 정정해 나갈 권리도 있었다. 영자의 기억은 무디고 오래됐지만 영자의 것이었다.

 

영자는 영자_2에게 유영이 좋아했던 간식거리를 물어보았고 로봇은 차분히 대답해 주었다. 영자는 일기장을 서랍에 넣은 다음 조용히 부엌으로 사라졌다.